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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유퀴즈 산업화 세대 민석기 파독 광부 임금 차이 경쟁률 글뤽 아우프

by Amanda11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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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기 산업화 세대

파독 광부의 산증인

산업화 세대 민석기

더운데 고생 많습니다.

저는 9150년에 태어나서

덤덤 6월에 6.25를 만났어요!

그래도 안 죽고

여태까지 잘 살아있습니다.

유퀴즈 세대 특집

산업화 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1945년 광복 이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태어난 세대

1960~70년 세계를 누비며

산업 잘전을 일구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주역

산업화 세대

1960년대 초

경제 개발 자금이 절실했던 정부는

노동력의 해외 송출을 추진했고

그들이 송금해 온 외화는

경제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쿠첸 밥솥 있잖아요.

쿠첸 본사에서

보안 근무를 하고 있어요!

쿠첸 밥솥이 아주 알아주는데요

밥이 따뜻하게 잘되고

갑자기 분위기 쾌속 백미

이것은 PR인가 PPL인가

밥솥주기관차

눈뜨고 당했습니다.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그때는 먹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8남매 중 둘째

그때는 왜 애들을 그렇게

많이 낳았는지 모르겠어요.

형제가 많은 것이 보편적이었던 그때

농경 사회, 자녀드링 곧 노동력이었고

기대 수명도 길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출산율이 높았다.

어렸을 때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대구로 나와서 과장 공장,

바가지 만드는 공장

몇 살 때 일을 시작하셨어요?

초등학교 마치고 나서 바로

그때는 다 일하러 가지

학교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 가르치잖아요

옛날 어른들은 왜 공부를 안 가르치는지

저도 사실 가방끈이 많이 짧아요.

유재석 : 열두 살, 열 세살의 나이에

돈 버는 일을 시작하신 거예요?

민석기 : 그렇죠 그때부터 집안이 가난하다 보니까

어쨌든 돈을 벌어야 되겠다

일을 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한 번도 결근한 일이 없고

한 번도 지각한 일이 없어요.

혹시 올해 연세를 여쭤봐도 됩나까?

올해 70이에요.

거의 평생을 일한 거죠

여전히 찢어질 듯 가난했기에

그 이후로도 대구에서

슈퍼 점원 일, 스웨터 짜는 일 등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고

광부로 일하기 위해 태백으로 향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관하여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15년간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7천900여 명의 젊은이들

지하 1,000m 아래에서 석탄을 캐고

궂은 간호 업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민석기 : 어느 날 아침에 출근하니까

누가 옆에서 그러는 거야

이번에 파독 모집 있다더라

그 이튿날 황급히 올라온 서울

하지만 와보니 모집은 끝난 후였다.

그래서 애원을 했지 붙잡고 꼭 가야 한다.

민석기 : 그러니가 그 아가씨가 안됐던지

그럼 지원서를 적어놓고 가라는 거야

아슬아슬하게 잡은 파독 광부 응시의 기회

민석기 : 회사에는 시험 보러 간다는 소리 안 했지

회사 감독한테는 서울에 집안일이 생겼으니

갔다 와야 되겠다.

밤새 일하고 새벽차로 다시 올라온 서울

서독으로 가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시험도 보셨다던데...?

모래 가마니 들기

영화 국제시장 중

서강대학교에 모여서 시험 볼 때

심사관 4명이 쭉 앉아 있는데

거기서 못 들면 그냥 불합격이야

수백 명이 뒤에서 보고 있는 거야!

민석기 : 내 차례가 와서

모래 가마니를 딱 들었는데

암만 올려도 안 올라가는 거야!

이거를 들면 가는데

이거를 못 들어서 못 간다고 생각하면

애타지 않겠어요?

민석기 : 배 위에다 끌고 안고 울고 있는 거야

심사관이 힘써! 힘써! 이러는 거야

결국 내가 안고 나자빠져 버린 거야

첫 번째 체력 시험은 불합격

민석기 : 그래서 집에 가서 나중에 또 시험 칠까 싶어서

가마니 하나 만들어서 저녁마다 연습했어 집에서

다시 주어진 체력 시험의 기회

그땐 그냥 들고 올려버렸지!

민석기 : 연습으로 요령이 생겨서 들고 던져버리니까

합격! 이러더라고 그때 그 합격 소리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완전히 날아갈 것 같더라고

당시 임금 차이가 얼마나 났나요?

당시 파독 광부들의 월급은

당시 원화 가치 13~19만 원

평균 650~950마르크로

이내 국내 직장인 평균의 8배에 달하는 큰 금액이었다.

1년 모으니까 대구에 집을 하나 사더라고요.

유재석 : 그러니까 1년 동안

서독에서 그렇게 일을 하시고

민석기 : 대구에 이층집을 하나 사더라고요

가난을 벗어날 기회로 여겨진 서독 파견

400명을 뽑는데 8,000명이 시험에 응시

경쟁률 20:1

어마어마했던 경쟁률...!

독일로 떠나던 날 기억나시는지?

민석기 : 1977년 8월 23일 날

김포공항에 그때는 한 사람이 비행기 타면

7~10명이 오는 거야 식구들이!

온 식구 총출동 우리집만 해도

부산서 오고 대구서 오고 다 온 거야

김포공항이 완전히 사람으로 가득찬 거야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한 여덟 시간을 걸려

딘스라켄에 갔는데

제 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를

기숙사로 만들어 놨더라고

침대, 목욕탕 다 잘해 놨어

한국보다 훨씬 잘해 놨찌

그때 나는 한국에서 침대를 못 봤거든

뭐 이리 좋은 데가 있나 싶더라고

처음 한 달 동안 교육 받고

독일인 Meister라고 반장 하나 붙여서

한국 사람 셋하고 그 사람까지

네 명이서 일을 하는 거야

처음엔 간단한 지시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쉬운 일도 실수하기 십상이었다.

광산 안은 그건 진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지하에서 전철로 한참을 가서도

더 내려가야 나오는 작업장

지열이 40도 이렇게 되니까

엄청 더운 거야

너 어떤 데 일할래 물으면

제일 힘든 일을 시켜줘라

힘든 일이 돈이 많이 되니까

더 많은 돈을 집으로 보내야 했기에

힘든 작업 환경을 기꺼기 자처했던 파독 광부들

먼지가 말도 못 하는 거라

나오면 콧구멍인지 눈구멍인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10년 정도 일했지

원래 3년 계약으로 떠난 독일

하지만 특유의 근면함으로 계약 연장

그들은 계약 연장을 제안받았고

그렇게 장기간 독일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조금 더 벌기 위해 떨쳐 낸 고향 생각

어렵게 휴가를 아껴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일하기 위해 썼다.

기숙사에 있다가 나중에는

밖으로 나간 거야. 농장으로

그 집에서 먹고 자고

일 거들어주면 돈을 조금 줘

그냥 돈을 아예 안 썼지

유재석 : 그러면 돈을 꽤 모으시지 않으셨어요?

민석기 : 많이 모아서

최고로 벌었다 그랬는데 돈을 벌어서

가족한테 보내면 그걸 잘 모아야 하는데

맨날 그렇게 잘 버는 줄 알고

빌려주고 못 받고 주고도 못 받으니까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한국으로 안 올 건데

귀국 전 통화에서 사업이 잘되고 있다고 했던 형

하지만 막상 한국에 와 보니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유재석 : 형님이 그러셨을 때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민석기 : 지금 원망한들 뭐해 지금 조카들 잘살아

잘살고 공부해도 작은아버지 안 찾아와

(무소식 희소식)

비록 가진 건 없었지만

근면함과 정직함으로 반짝였던

당신의 삶

주관식 문제 : 

이것은 파독 광부들의 아침 인사말입니다.

이들은 지하 1,200m, 40도를 넘나드는

탄광으로 들어가기 전

무사히 돌아오라는 뜻의

독일어 인사를 나눴다고 하는데요

그리운 고향과 가족,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던

이 인사말은 무엇일까요?

정답 : 글뤽 아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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